[이글은 로버트 S. 김이 Providence에 기재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그에 관한 정보는 하단에 있다.] 미국 주도의 개신교 선교는 기독교 역사상 한 나라를 가장 빠르고 철저하게 변화시킨 사례 중 하나였지만, 한국전쟁이 미국인들의 시선을 한반도로 끌어모을 무렵에는 이미 대중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단기간에 급부상해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고, 미국의 대외정책과 긴밀히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미국 사회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종교적·사회적·정치적 운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반도가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은, 오늘날 한미 관계의 기원이 된 이 독특한 역사적 사건을 다시 돌아보고 기억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한국 기독교: 미국에서 영감을 받은 혁명적 운동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기독교를 전한 시기는 수백 년 이어져 온 왕조와 사회 질서가 붕괴해 가던 때였으며, 왕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애국적 인물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1880년대 초 전후로 한국은 외세의 군사적 침입을 겪으며 19세기 말 근대적 군사력 앞에서 자신의 취약함을 절감했고, 1876년에는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의 마지막 군주 고종은 미국을
견미단을 출발하기 전, 이승만 박사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건국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이승만 박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그 순간에 있었다면, 내가 이승만 박사였다면 과연 같은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견미단에 가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하와이에 착륙하는 순간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견미단을 통해 이승만 박사의 발자취를 밟으며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다. 더불어 더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겁먹는 것이 아닌 반대로 하나님께 앞으로의 인생을 맡기겠다는 담대한 다짐과 고백을 했다. 견미단을 오기 전에는 스스로 믿음에 대해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그냥 외면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니 피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이승만 박사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와 닿았다. 이어 나도 하나님께 이승만 박사처럼 쓰임 받고 싶어졌으며 자연스레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승만 박사가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기도를 하다 보니 이승만 박사와 나를 사람 대 사람으로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이승만 박사가 바라본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결국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견미단은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견미단이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지원을 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한 번의 불합격 통보와 그 뒤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으로 견미단에 함께하게 되었다. 견미단의 일원이 되는 순간부터 나는 일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구하며 이번 견미단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일정이 시작되고 나서 제일 먼저 간 곳은 하와이였다. 하와이에서는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선조들의 발자취들이 많이 담겨있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많은 한인 분들이 직접 생활하시고 또 역사를 써나가셨던 곳들에 가보게 되면서 마음이 경건해졌다. 우리의 조상들이 하와이라는 타지에서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많은 기도와 행동을 쌓으셨다는 것에 정말 많은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조선의 크리스천들이 행동으로 나섰고 그들의 기도가 쌓여서 대한민국이 건국 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거
1883년 7월 제물포항에서 출발해 태평양을 횡단하여 미국에 도착한 견미단이 있었다. 이들은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아시아 선교사역에 열정을 갖고 있는 가우처 목사를 만났다. 가우처 목사는 1883 견미단과의 만남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아직 선교사가 파송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가우처목사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본부에 조선 땅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며 2천 달러의 헌금과 함께 조선 선교를 향한 마음을 편지로 보내기도 하였다. “뉴욕 감리교 선교본부 파울러 CH.Fower 감독께, 감리교 목사 가우처 John F.Goucher입니다. 저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 DC로 가는 열차 안에서 조선에서 온 민영익과 견미사절단을 만났습니다. 그 후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동안 가려졌던 이 은둔의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주기 바라며 선교비로 2천 불을 보냅니다. ” - 1883년 11월 5일 가우처 가우처 목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조선 땅에 선교사가 파송될 수 있었다. 이처럼 1883년 견미단을 통해 조선선교의 문이 열렸다. 열차 안에서의 가우처 목사와 1883 견미단의 만남은 단순한
내가 깨어진 과정 마태복음 9장 16~17절에 의하면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헌 가죽부대는 이전 포도주의 발효로 발생한 가스로 인해 손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새 포도주에서 발생한 가스를 담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이번 나의 견미단 일정은 가죽부대 비유가 적절한 것 같다. 나는 19살 즉 4년 전까지만 해도 보수주의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고 그 반대진영에 몸을 담았었고 이승만을 “독재자” 내지는 전쟁광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한 바이러스 이후 나의 모든 사상이 깨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찬양하던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헌법의 가장 기본 정신인 “자유”를 침해하는 모습을 보며 내 지난 모든 날들이 후회되었고, 내가 미워하던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 이 땅에 종교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심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의 20살 시절부터 이승만 박사에 대한 궁금증과 그가 했던 모든 일들이 궁금해지며 자연스럽게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헌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보수주의에 눈을 뜨고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를 공부하며 나는 계속해서 지식을 채워나갔다. 누구보다 열심히 세계로교회 손현보 담
천지개벽(天地開闢)! 1883년 미국 땅을 밟았던 견미단의 첫 인상이다. 그들은 외친다. 그들은 천지가 뒤집어진 듯 변화로 몸부림치는 미국을 보며 포효한다. "나는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가 광명 속으로 들어왔다.” 1883년 견미단에게 광명을 선사한 미국 – 그 광명의 원천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찬란하고 아름다운 혁신적 기술들이었을까.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갔던 벅차오름이었을까. 견미단의 마음 깊이 견고하게 뿌리내린 단 한가지의 광명, 바로 미국의 정신(spirit)이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미국은 분명한 건국정신과 함께 국가의 시작을 알렸다. 미국 자유의 상징인 ‘자유의 종(Liberty Bell)’에도 “이 땅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라는 구절로 이를 공고히 하였다. 미국은 이 ‘자유정신’을 단순히 문자로 남겨두지 않고 엄연한 실체로써 현현(顯現)하였다. 독립전쟁의 피로써 미국의 자유정신을 쟁취하였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정신은 흐르고 흘러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정신이 되었다. ‘독립에 미친 늙은이.’ ‘망한 나라의 노예.’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 참혹한 인생, 대한을 쟁취하였다. 이 숭고한 건국정신의 물줄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 1절 말씀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고백이다. 주님만이 전부라 내 마음의 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 예수님을 청년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조국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출옥 후 곧장 미국 유학행에 오르게 된다. 당시 칼뱅의 종교개혁에 입각한 커리큘럼으로 교육받던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보내며 ‘자유민주공화국’으로 대한민국을 세우는 건국의 그림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이후 미국의 1776정신을 이어받아 죄로부터의 자유(freedom)와 정치적 자유(liberty), 자유를 지켜내려 고군분투했던 그의 인생이 펼쳐진다. 하와이의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잠들었던 그의 마지막 여생까지, 글로 감히 다 담아낼 수 없는 나라를 향한 그의 사랑과 헌신으로 나는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내가, 그와 동시대에 태어나 그의 동역자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송구스러울 정도다. 현재 대한민국은 그 어느 순간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살아생전 지켜내려
견미의 이유 “아시다시피 우리는 자유가 생명 그 자체보다도 더 귀중함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외국 원수로는 최초로 뉴욕시 오픈카 퍼레이드에 초대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 중 한 말이다. 견미단의 필독서였던 <워싱턴의 겁쟁이들>에서 해당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자유”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견미단 활동의 취지와 메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라는 표현이 있듯이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생명만큼 소중하며 심지어 생명보다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 이를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620년 정치적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한 필그림들은 예상치 못한 추위와 식량난, 그리고 질병으로 인해 출발한 인원수의 절반이 죽었지만, 도착 1년 후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라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그림을 기리는 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의 네 면에는 그들이 얻고자 했던 자유(Liberty), 그리고 그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Education), 법(Law), 도덕(Mo
▲ AI 생성 [이 글은 지난 2월 16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In Pursuit’에 기고한 글(https://inpursuit.substack.com/p/george-washington-by-george-w-bush?utm_source=publication-search)을 번역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 건국 250주년을 맞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리더십을 돌아본다. 추앙받는 전쟁 영웅으로서 절대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던 인물, 그러나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으며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을 세운 지도자. 부시는 워싱턴의 겸손과 절제, 그리고 권력을 대하는 태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 정치의 뿌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글은 단순한 역사적 회고가 아니라,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기고문 전문 : 미국 독립 25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 조지 워싱턴의 리더십에 대해 글을 쓰게 되어 참 기쁩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저는 역대 대통령들의 삶과 그들이 지닌 자질들에 대해 읽으며 큰 위로와 영감을 얻곤 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결단력, 해리 트루먼의 단호함,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의 낙관
새 광고 디즈니 크루즈 라인(Disney Cruise Line)이 가족 중심적인(pro-family)와 감동적인 스토리라인으로인해 온라인에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일요일 아카데미 어워즈(Academy Awards)에서 공개된 90초 광고 “미드나이트 매직”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집중했다. 영상은 한 밤중 아버지가 그의 갓난아들을 데리고 배 위를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광고는 아들이 커가고 10대가 되어 같이 산책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까지 이어진다. 이 가슴 따뜻한 이야기는 어른이 된 아들이 문을 두드리고 늦은 밤 같이 배 위를 자신의 어린 딸과 함께 걷자고 아버지께 물으며 끝이 난다.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은 ‘함께하는 아버지의 모습’, '가족의 전통’, ‘추억 만들기’라는 메시지에 깊이 공감하였다. 한 네티즌은 “아무 아버지나 이걸 보고 울지 않기를 도전해보세요” 라고 적기도 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디즈니가 대박냈다!! 아빠들은 정말 대단하고 조용히 반성하는 그 장면들과 아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정말 소중해. 너무 좋다!!!” 라고 말했다. 다른 네티즌들은 전통적인 가치를 다시 장려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어느 한 사람은 “원래의 디즈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