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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주정치를 만든 세 혁명과 세 권리 선언

프랑스혁명의 권리선언이 전체주의로 귀결된 이유

 

[이 글은 찰스 R.캐슬러(Charles R. Kessler)가 Claremont Review of Books 에 기고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필자 소개는 글 말미에 덧붙였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는 세 차례의 위대한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영국·미국·프랑스 혁명은 서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지만, 각각 정치적 변화를 정당화하고 설명하는 나름의 공개 선언을 남겼다. 미국인들이 독립 250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지금, 다른 두 혁명의 선언과 미국의 독립선언을 간략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다른 선언들과의 차이를 통해 미국의 독립선언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영국 권리장전 (The English Bill of Rights)

 

첫 번째는 1689년 2월 13일 제출된 영국의 권리선언이었다. 이 선언을 제출한 의회는 정식 절차에 따라 선출된 의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의회가 오라녀 공 윌리엄과 그의 아내 메리 공주에게 영국 왕위를 제안했다. 메리는 폐위된 가톨릭 국왕 제임스 2세의 개신교 신자 딸이었다. 제임스 2세는 사실상 퇴위한 뒤 프랑스로 도피한 상태였다. 윌리엄은 그 전해 11월, 소수의 휘그당 및 토리당 유력 인사들이 그를 영국으로 초청하자 네덜란드군 약 1만 명을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다. 하비 맨스필드(Harvey Mansfield)의 표현을 빌리면, "침공군이라 하기에는 너무 적고, 방문객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권리선언을 공식화하기 위해 의회는 이를 정식 표결로 제정했고, 새로운 국왕은 1689년 12월 16일 이를 승인했다. 법률의 정식 명칭은 "신민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확정하는 법"이었다. 여기서 '영국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권리장전은 명예혁명을 완성하고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 명예혁명은 약 50년 전 내전과 함께 시작된 영국 혁명의 마지막 단계였다.

 

영국 권리장전은 그러나 세상을 향해 작성된 보편적 문서가 아니다. 영국인들이 영국인들을 위해 작성한 문서다. 이와 달리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고, 실제로 세상이 듣기를 기대했던 선언이다. 두 선언은 또한 자연권을 다룬 문서다. 영국 권리장전에는 자연권이라는 개념에 대한 호소가 전혀 없다. 오히려 이 문서의 핵심은 자연권과 관습적 권리, 즉 영국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권리 사이의 구별을 흐리는 데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훗날 이러한 신중한 혼동을 하나의 정치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권리장전 지지자들은 이를 통해 혁명을 왕위 계승 위기로 위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 내전을 촉발했던 의회의 권력과 국왕 특권 사이의 원칙적 논쟁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 시대 영국을 뒤흔들었던 계시된 진리를 둘러싼 종파적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도 종교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묘한 우회를 통해, 교회의 수장으로서 국왕의 지위에 기반을 두고 있던 영국 왕정의 독특한 정당성이 보존되는 동시에 새로운 관용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새로운 체제였다는 사실은, 관용을 정당화하는 새롭지만 명시적으로는 설명되지 않은 논리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특히 왕권의 신적 권리를 내세우던 언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새로운 충성 서약을 증언하는 분으로만 언급된다. 오라녀 공을 "이 왕국을 교황주의와 자의적 권력에서 해방한 영광스러운 도구"로 세우고 "왕족들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따라서 영국 권리장전에서 주장되고 옹호된 것은 인간의 자연권이 아니라 "영적·세속의 귀족과 평민"이 누려 온 "고대의 권리와 자유"였다. 왕국의 "종교와 법률, 자유"는 개신교 왕위 계승과 의회가 "이 왕국 국민의 진정하고 오래되었으며 의심할 수 없는 권리와 자유"를 선언함으로써 보장되었다.

 

이 모든 합의를 봉인한 것은 새로운 충성 서약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개의 서약이었다. 하나는 윌리엄과 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 문제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을 거부하는 서약이었다. 후자의 서약은 가톨릭의 사변적 교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가증스럽고 저주받을 교리와 주장"을 거부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서약의 명시적 근거는 이론적이라기보다 실천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실용성은 인간의 시민적 이해관계, 즉 생명·자유·재산과 영혼의 구원이라는 사적 관심을 구분하는 새로운 관용론과 관련되어 있었다. 법률은 로크적인(Lockean) 절제된 표현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교황주의 군주나 가톨릭 신자와 결혼한 왕이나 여왕이 이 개신교 왕국을 통치하는 것은 왕국의 안전과 복지에 양립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앞서 살펴본 것처럼 프랑스와 미국의 선언은 모두 자연권을 언급한다. 그러나 두 선언은 자연권에 관해 서로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최근 학계와 대중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엄청난 차이가 충분히 주목받지도,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다.

 

두 문서의 논리적 차이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두 선언이 애초에 서로 다른 목적을 지녔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선언은 제목이 암시하듯 한 민족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려는 문서가 아니었다. 자연권과 시민권, 즉 두 종류의 권리가 무엇을 의미하며 왜 중요한지를 동시에 선포하려는 문서였다.

 

미국 독립선언은 자연법과 자연권을 선언의 첫머리에서부터 유명하게 설명한다. 또한 조지 3세에게 제기한 일련의 폐해와 찬탈 행위를 읽다 보면, 시민권이 무엇이며 정부가 시민권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에 관한 설명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선언은 시민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이를 위해 어떤 정부를 세워야 하는지에 관한 조언을 다른 장에 맡긴다.

 

그 대상은 독립을 이룬 뒤 식민 정부나 왕정 정부를 곧 대체해야 했던 미국의 각 주와, 연합규약 초안을 작성하도록 제2차 대륙회의가 별도로 구성한 위원회였다. 몇 년 뒤인 1787년, 연합규약에 따라 세워진 정부마저 붕괴 직전에 이르자, 제대로 기능하는 공화정 정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헌법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했다. 그 논쟁은 훗날 『연방주의자 논집』에 기록으로 남았다.

 

프랑스 선언은 이 두 종류의 과제를 하나로 합치려 한다. 자연권과 시민권을 동일한 문제나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으로 묶으려 한다.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보면 프랑스 선언은 신중함, 헌정주의, 명예라는 세 가지 요소를 암묵적으로 낮추어 본다는 점에서 미국 선언과 구별된다.

 

프랑스 선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의 권리에 대한 무지와 망각, 경멸이 공공의 불행과 정부 부패의 유일한 원인이다.”

(that ignorance, forgetfulness, or contempt of the rights of man are the sole causes of public misfortunes and the corruption of governments.)

 

이는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수하거나 불행을 겪을 가능성, 또는 정부와 국민이 지나치게 선한 것을 추구하다 부패할 가능성을 사실상 부정하는 터무니없는 전제다. 이러한 관점에서 통치의 기술은 시민들의 "요구"가 선언의 "단순하고 논박할 수 없는 원칙"에 근거하도록 보장하는 일만큼이나 단순하다.

 

요컨대 시민들의 동기가 순수하다면 그들의 요구에는 아무런 제한이 필요하지 않다. 정당한 원칙은 어차피 "단순하고 논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화정의 대의 안에는 시민들이 멈춰 서서 생각하게 하거나 다른 정권과 정치가들의 조언을 구하도록 만들 만한 딜레마나 상충 관계, 내재적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회는 "헌법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선언은 프랑스의 구체제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라는 단순한 교리의 틀 바깥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숨어 있다. 미국 독립선언이 조지 3세의 폐해와 찬탈 행위를 길게 고발한 것과 같은 내용은 프랑스 선언에는 없다. 미국인들이 조지 3세에게 들이댄 군주제와 폭정의 구별도 찾아볼 수 없다.

 

정당한 정부 형태는 오직 공화정뿐이다. 이것은 장 자크 루소(Rousseau)의 가르침이었으며 프랑스 선언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모든 주권의 원천은 본질적으로 민족(Nation)에게 있다." 따라서 "법은 일반의지(General Will)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미국 독립선언에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고 미국 헌정주의의 토대가 된 헌법적 규범과 일반 법률의 구별은 유지될 수 없다. 모든 법의 근거는 일반의지이며, 일반의지는 정의상 오류를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가들은 푸블리우스가 『연방주의자 논집』 제49편에서 구별한 것처럼, 헌법에 영구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공공의 이성"과 정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공공의 열정"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 독립선언은 정부의 "정당한 권력(just powers)"이 "피치자의 동의(consent of the governed)"에서만 나온다고 신중하게 명시한다. 반면 프랑스 선언은 "모든 주권"이 "민족"(Nation)에게 있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어떠한 집단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독립선언의 서명자들처럼 신중한 사람들이 행사하는 비공식적 권위는 의심받고 배척된다.

 

미국식 자유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다양한 견해와 이해관계는 프랑스식 또는 루소식 사회계약론에서는 기껏해야 허위의식의 표현으로, 더 나쁘게는 부도덕한 이기주의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공통의 혈통과 언어, 종교, 문화를 토대로 한 정치 이전의 "국민"은 미국 독립선언의 "국민"과 전혀 다르다. 미국의 국민은 여러 개인이 정치적 행위를 통해 결합한 결과다. 이들은 함께 "안전과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결합하는 데 동의했다.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는 "일반의지"가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이상화된 민족 공동체가 곧 새로운 정화된 국민을 향한 필사적이고 종종 격렬한 추구로 바뀌었다. 그 새로운 국민은 공화국의 적들을 상대로 반복적으로 행사된 혁명적 공포정치를 통해 태어났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는 행복이나 행복의 추구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인간과 정치적 삶의 목적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대중의 의지를 진정한 자치의 수준으로 교육하고 고양하는 헌정 형태를 뒷받침할 수 없다.

 

프랑스 선언은 급진적이지만 정치적 삶이나 자유에 대한 생생한 감각은 결여되어 있다. 문서 전체가 3인칭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하나의 위협적이거나 권위적인 대조에서 또 다른 대조로 갑작스럽게 옮겨 간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라.

 

“자의적인 명령을 요청하거나 촉진하거나 집행하는 자, 또는 그러한 명령을 집행하게 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법에 따라 소환되거나 체포된 모든 시민은 즉시 복종해야 하며, 저항하면 유죄가 된다.”

(Whoever solicit, expedite, or execute arbitrary orders, or have them executed, must be punished; but every citizen summoned or apprehended in pursuance of the law must obey immediately; he renders himself culpable by resistance.)

 

여기서 호명되는 시민은 "사회체의 구성원"이다. 그들의 모든 사회적 구별은 "공공의 효용"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민"의 진정한 의미다. 모든 사람은 "사회체"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자치와 인간의 개별성, 차이, 자부심은 모두 의심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자유의 제한, 곧 사회 곳곳에 권위가 개입해야 한다는 점이 끊임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시민은 실제로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존재로 신뢰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독립선언의 서명자들은 "이 식민지들의 선량한 국민"에게 호소하며 서로에게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신성한 명예"를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프랑스 선언에는 명예, 하물며 신성한 명예는 필요하지 않다. 그곳에는 언제나 일반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의회 구성원들은 "최고 존재의 현존과 보호 아래" 글을 썼지만, 미국의 서명자들이 "우리 의도의 정직함"을 위해 "세계의 최고 재판관"에게 호소한 것처럼 하나님께 호소하지는 않았다.

 

프랑스 의원들의 의도가 정직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올바른 이론을 따르고 있다는 점으로 보장된다. 그들은 프랑스 선언 자체에 서명할 필요가 없었고, 실제로 서명하지도 않았다. 선언에는 서명이 없다. 그것은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프랑스 국민에 결코 속할 수 없었던 모든 사람을 제외한 국민, 즉 국민의회의 선포였다.

 


인류의 역사에서…(When in the Course of Human Events)

 

이제 독립선언으로 눈을 돌려 보자.

외형상 독립선언은 미국 국민이 영국 국민과 결별한다는 선언이다. 동시에 그 결별을 도덕적·법적으로 정당화하는 문서이며, 그 정당화는 장차 억압자가 될 영국을 상대로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는 일까지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선언은 관련 법률, 곧 "자연의 법과 자연의 하나님의 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 그 법 아래에서 한 국민이 누리는 권리를 설명한다. 그 다음에 조지 3세의 폐해와 찬탈 행위를 길게 고발하면서 영국 국민에게 항의한다. 이는 사건의 사실관계를 밝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논증의 결론, 즉 요구하는 구제책과 판결을 제시한다.

 

"이 연합 식민지들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요컨대 독립선언은 자연법에 따라 작성된 법률 의견서의 형식을 취한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한 국민(a people)"을 위해 소송을 제기한다.

 

"한 국민이 다른 국민과 자신을 연결해 온 정치적 유대를 해소하고, 자연법과 자연의 하나님이 정한 법에 따라 지구상의 열강 가운데 독립적이고 평등한 지위를 차지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다."( it becomes necessary for one people to dissolve the political bands which have connected them with another, and to assume among the powers of the earth, the separate and equal station to which the Laws of Nature and of Nature's God entitle them)

 

미국 국민이 차지하려고 애쓰는 "지위(station)"는 정확히 말해 권리로 보장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법에 따른 자격이다. 자연은 '독립(separate)'이라는 칭호를 제공하고 부여하지만, 그 칭호를 요구하고 정당화하는 일은 국민에게 달려 있다.

 

그들은 그 지위를 "차지해야(assume)" 한다. 이는 지위나 의무를 선택하거나 떠맡는다는 뜻일 수도 있고, 꾸며 낸 명분을 내세워 스스로에게 부여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미국인들이 차지하려는 "지위"는 의무를 수행하도록 배정된 사람의 자리인가, 아니면 아무런 의무도 따르지 않는 특권적 지위인가? 이 두 의미 사이의 문제는 독립선언이 독립의 "원인"을 밝히는(declare the causes) 선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해결된다.

 

미국 국민은 "인류의 의견에 대한 상당한 존중(decent respect to the opinions of mankind)"을 보인다. 그러한 존중은 지구상의 열강 가운데 자신들의 지위를 차지하는 일이 공개적인 이유를 통해 정당화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독립의 칭호는 "필요해졌을 때(when it becomes necessary)" 차지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필요성은 피할 수 없거나 비이성적인 무엇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기에 결국 이루어질 일"(which impel them to the separation)을 뜻한다. 독립선언에서 필요성의 목소리는 신중함이나 도덕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신중한 판단과 실천적 이성이 낳은 도덕적 명령이며, 의무의 목소리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인류의 의견에 대한 상당한 존중"을 저버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 국민은 세계 속에서 독립적 지위를 차지하는 일이 필요하고 동시에 정당할 때에만 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 국민은 자연의 하나님이 정한 법에 근거해 독립을 주장한다. 선언의 후반부에서는 대표자들이 "세계의 최고 재판관(supreme Judge of the world)"과 "신의 섭리(divine Providence)"를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하나님께 상소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선언의 수사적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청구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판단이라는 지상의 법정에 호소하는 데 있다.

 

그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법정은 "인류의 의견(opinions of mankind)"이다. 이는 인류의 열정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연방주의자 논집』 제10편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독립선언은 영국 정부나 정부 일반에 맞서 대중 파벌을 선동하는 문서로 비난받을 수 없다.

 

사람들의 의견은 서로 다르며, 모든 의견이 똑같이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의 호소는 이성이 더 나은 의견과 나쁜 의견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또한 "인류의 의견"은 이성에 호소할 수 있으며, 인간이 평상시에도 완전히 비이성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 점은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투는 개인들, 정부 부처들, 국민과 정부, 독립국가들 사이를 판단해 줄 지상의 권위가 없을 때, 존 로크(John Locke)는 『통치론』에서 유일한 해결책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로크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필요로 했다.

 

인간들 사이의 분쟁을 판단할 "지상의 재판관이 없을 때" 모든 사람은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입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최고 재판관에게 호소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 대안은 이성 자체, 즉 신중한 사람이 도덕적·정치적 논쟁의 자연스러운 재판관이라는 사실이 배제될 때에만 등장한다.

 

독립선언에서는 신중함이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 국민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기를 바라며 단순히 하늘에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인류의 의견에 대한 상당한 존중"도 보인다.

 

이는 인류의 의견 속에 충분한 정의 또는 올바른 이성이 존재해 "상당한"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완전한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은 신중함(Prudence) 자체다.

 

물론 신중함이 인간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끌 수 있다고 해서 언제나 효과를 발휘한다는 보장은 없다. 신중한 사람이 언제나 경청자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필요한 순간에 반드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이론적으로 하나의 중간 지대를 설정한다.

 

한편에는 인간의 정신에 종종 신의 의지로 보일 수밖에 없는 신적 정의의 신비로운 작용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연 상태에서, 그리고 "권리 없는 강제"가 전쟁 상태를 다시 불러오는 시민사회에서 인간이 정의를 집행하는 방식이 있다. 로크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기 쉽다.

 

따라서 독립선언에서 자연법은 먼저 지구상의 열강을 다스리는 국제법으로 나타난다. 자연법은 독립의 칭호를 주장하는 국민이 필요하고 정당한 때 독립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독립적이고 평등한 지위"를 인정할 것을 열강에 요구한다.

 

동시에 자연법은 국민에게도 자신에게 부여된 지위에 머물고, 권리의 목소리뿐 아니라 의무의 목소리에 응답해 자신의 지위를 떠맡을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자연법은 자기보존을 우선하는 규칙이 아니다. 타인의 보존을 돕는 의무를 요구하는 규칙도 아니다. 로크는 자연법이 사람에게 "인류의 나머지를 보존할" 이차적 의무를 부과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자의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버리지 말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지위를 버린다는 것은 자살을 뜻한다.

 

그러나 1776년 미국인들에게 자연법은 자신의 지위를 자의적으로 차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스스로 준비되었고 상황이 이를 요구할 때까지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이 위험에 처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위를 버려서도 안 된다.

 

프랑스 선언과 미국 선언의 차이는 전자에 루소가, 후자에 로크가 상대적으로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로크의 논의를 독립선언 자체의 정서와 논증에 비추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토머스 제퍼슨이 헨리 리에게 보낸 1825년 5월 8일자 편지에서 말한 "이 문제에 대한 상식", 즉 "미국인의 정신"이 파악한 상식에 비추어 로크의 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높은 것과 낮은 것

 

독립선언의 유명한 두 번째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 권리 가운데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는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믿는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이 진리들은 자명한 것(self-evident Truths)으로 받아들여진다. 독립선언은 이를 자기보존의 욕구나 그보다 앞선 인간의 열정에서 도출하지 않는다. 독립선언을 로크적 또는 '근대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이들은 종종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선언의 본문에는 이러한 설명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는 태도가 나타난다. 평등에 대한 추가적인 증명을 요구하지 않고, 동일한 열정에서 평등한 권리를 도출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어쩌면 건국의 아버지들은 단순히 건강한 편견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제1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인류의 의견에 대한 상당한 존중"을 표했는지도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창조주 다음으로 스스로의 제1원인이다. 창조주는 인간을 철저히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지도, 완전히 노예적인 존재로 만들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 개개인을 평등하게 창조하셨다. 인간은 권리와 이성이라는 선물을 동일하게 부여받았다. 따라서 그 진리는 자명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로크의 설명에서 인간 평등의 근원처럼 보이는 불가침의 열정을 대신해, 인간 자유의 근원이 되신다. 인간 자유는 인간 평등의 결과다.

 

독립선언에서 평등은 낮은 것이 아니라 높은 것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인간은 오만한 욕구만을 부여받은 존재가 아니다. 우연이나 변덕이 이끄는 방향이라면 어디로든 스스로를 재창조할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도 아니다. 반대로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부여된 선물은 단순한 무상 증여도 아니고 계약에 따른 양도도 아니다. 그것은 수령자가 본질적이고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사용해야 하는 영구적인 자원이다. 정당하게 양도하거나 소진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권리는 본질적인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사용되거나 행사되어야 한다.

독립선언은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즉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인간 중에 정부가 세워졌으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에서 나온다.”

(to secure these rights, Governments are instituted among men, deriving their just powers from the consent of the governed.)

 

독립선언은 정부가 무엇보다 먼저 인간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국민이 동의를 행사해 정부를 세웠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정부가 인간 사이에 세워졌다고 말할 뿐이다.

 

또한 "정부의 정당한 권력"이 피치자에게서 부여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권력이 "피치자의 동의"에서 도출된다고 말할 뿐이다. 어쩌면 정부 역시 본래 자연이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는 인간이 자연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여 정부를 세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부의 목적은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권리를 직접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정부가 동일하거나 서로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가 "목적"으로 이해되는 순간 "정부 형태"라는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다.

 

어떤 정부 형태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하게 되면, 국민은 그 정부를 변경하거나 폐지하고,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실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원칙 위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그 권력을 그러한 형태로 조직할 권리를 갖는다.

 

개인의 권리는 정부 일반에 의해 보장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민의 권리"는 "정부 형태"의 선택과 밀접하고 명시적으로 연결된다.

 

국민은 정치적 선택의 결과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부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지구상의 열강 가운데 "독립적이고 평등한 지위"를 차지하기로 결정한다. 모든 국민은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보다 먼저 존재한다. 개인들이 선택하는 행위는 잠재적이거나 잠복해 있던 권리를 현실의 권리로 바꾼다. 개인들의 만장일치 동의를 피치자의 동의로, 그리고 통치하는 국민의 동의로 전환한다.

 

따라서 정부가 그 목적, 즉 권리의 보장을 파괴하게 되면 정부는 단순한 "정부"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특정한 "정부 형태"가 되며, 다른 형태를 위해 거부될 수 있다.

 

국민은 낡은 정부 형태를 "변경하거나 폐지"하는 선택을 할 때 정부 일반을 폐지할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권리"는 오히려 새로운 정부를 세울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과 행복을 실현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하는 원칙 위에 새 정부의 기초를 놓고 그 권력을 특정한 형태로 조직해야 한다.

 

식민지 주민으로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부 아래 사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그 정부의 제국적·군주제적 형태는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내부에서도 정부의 형태가 언제나 명시적으로 국민의 선택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각 식민지의 법률에 대해서는 국왕이 거부권과 재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낡은 정부 형태를 변경하거나 폐지할 권리를 행사하는 국민이 되었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새로운 형태를 세울 의무가 있다. 실제로 독립선언은 정부의 해체를 말할 때마다 곧바로 정부의 재건을 언급한다.

 

따라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지구상의 열강 가운데 "독립적이고 평등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다. 국민이 권리를 행사할 때 그들은 하나의 체제를 선택한다. 체제의 "원칙"과 "권력"은 단순히 권리를 보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모든 올바른 "정부"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국민은 여기서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까지 실현할 정부 형태를 세운다. 개인은 "생명과 자유, 행복의 추구(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행복의 추구"가 반드시 행복 그 자체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원문의 대문자 표기는 새로운 정부 형태에서 강조점이 행복의 추구보다 "행복"에 놓인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독립선언에서 자연권, 즉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서 정치적 권리로 나아가는 과정은 자연권을 불가침의 열정이 아니라 창조주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준다. 두 번째 문단의 논증 과정에서 자연권은 분배적 정의, 즉 정치 이전의 정의가 아니라 정치적 정의의 표현이 된다. 자연권은 체제의 원칙이 된다.

 

인간이 부여받은 것은 정치에서 사용된다. 국민을 구성하고 정부 형태를 선택하는 행위 속에서 사용된다. 사실 이 두 활동은 하나가 된다.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실현하는 정부는 국민의 행복관을 반영해야 할 뿐 아니라, 국민이 앞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정부가 "목적"으로 이해된 권리를 파괴할 때 그 권리는 정부 형태를 선택하는 국민의 결단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국민은 기존 정부 형태를 "변경하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러나 체제나 정부 형태를 선택하는 일 자체가 이러한 권리를 다른 방식으로 "목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권리는 정부 형태와 무관한 중립적 목적이 아니라, 특정한 정부 형태가 실현하려는 목표가 된다. 그 정부는 권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실현"하고, 그 체제가 이해하는 "안전과 행복"을 구현하려 한다.

 

따라서 국민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를 수단으로만 행사하는 일이 아니다. 그 권리 자체가 체제를 구성하는 목적이 된다.

 

이제 독립선언에서 자연법과 자연권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지구상의 열강을 규율하는 "자연의 법과 자연의 하나님의 법"은 "국민의 권리"를 지배하며, 궁극적으로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unalienable Rights)"도 지배해야 한다.

 

권리의 기원이 "창조주(Creator)"에게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결론은 "인간의 권리"가 단순히 인간이 가진 권리가 아니라는 점을 함축한다. 인간의 권리는 모든 피조물과 자연의 위계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참여로부터 의미를 얻는다.

 

인간은 신적 본성과 인간 이하의 자연 사이에 놓인 중간적 피조물이다. 이성은 인간을 하등 동물과 구별한다. 이성이 완전한 지혜와 정의에 이르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과 구별된다.

 

따라서 인간의 권리는 우주 안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지위에 적합한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전체 자연의 법칙에 부합해야 한다. 실제로 독립선언은 권리를 다루기 전에 먼저 자연법의 권위를 불러낸다.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선언을 작성하기 위한 직접적인 정치적·철학적 준비였던 1774년의 소책자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에 관한 개요」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유로운 국민은 자신의 권리를 최고 행정관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자연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Claiming their rights, as derived from the law of nature, and not as the gift of their chief magistrate.)

 

토머스 홉스(Hobbes)부터 시작된 근대적 자연법론이 자연법을 자연권에 종속시키려 했다면, 즉 인간의 의무보다 인간의 권리를 우선하고 자연법을 자연권에서 도출된 일련의 명제로 만들려 했다면, 독립선언이 단순히 그러한 전통에 속한다고 말하거나 그 전통만으로 독립선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에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국민의 권리"는 변덕에 따라 행사될 수 없다. 독립선언은 국민이 정부를 변경하거나 폐지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경우를

 

"어떤 정부 형태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하게 될 때"로 한정한다.

(Whenever any Form of Government becomes destructive of these ends)

 

또한 독립선언은 이렇게 경고한다.

 

"신중한 판단은 오랜 세월 존속해 온 정부를 사소하고 일시적인 이유만으로 바꾸지 말 것을 요구한다."

(Prudence, indeed, will dictate that Governments long established should not be changed for light and transient causes.)

 

경험은 인간이 이 권리를 쉽게 남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인간은 "악이 감내할 수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이 익숙해진 정부 형태를 폐지해 스스로를 바로잡기보다 고통을 감수하려는 성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보수적이고 신중하다. 새 정부에 배치할 "원칙"과 "권력"을 선택해야 하므로 더욱 신중하다. 정부를 변경하거나 폐지하는 모든 결정은 장기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런 중대한 사안에서 충분히 숙고하는 것은 신중함이라는 덕목의 본질이다.

 

그러나 중대한 정치적 변화를 결정할 때 신중함을 지나치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 역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필요할 때 피해를 입은 국민은 기존 정부를 "폐지함으로써" 스스로를 "바로잡아야" 한다.

 

스스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은 자연법이 인간에게 자연법을 집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인간에게 그러한 일을 할 능력을 부여한 창조주의 의도와 일치한다. 또한 독립선언이 뒤에서 확인하는 "신의 섭리의 보호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기존 정부 형태를 해체하는 것이 신중한 일일 때, 즉 독립선언의 단호한 표현처럼 "반복되는 폐해와 찬탈의 긴 행렬이 언제나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며 그들을 절대적 전제정치 아래 두려는 계획을 드러낼 때", 그 국민은 "그러한 정부를 떨쳐 버릴 권리 이자 의무를 갖는다."

 


권리와 의무 (Right and Duty)

 

"국민의 권리"가 실제로 행사되는 최대 위기의 순간, 그 권리는 의무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권리와 의무는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자연법에 따라 옳은 일을 하라는 명령 속에서 두 가지가 하나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려면 신중함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독립선언의 서명자들이 자신들을 독립으로 이끈 "원인"을 선언했듯이, 신중함은 말하고 명령한다.

 

혁명을 정당화하는 그들 자신의 논리에 따르면, 독립선언에 담긴 대표자들의 목소리는 신중함의 목소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의 논리는 위대한 민중 봉기 속에서도, 아니 특히 그런 순간일수록 신중함이 권위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신중함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식민지들의 선량한 국민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 권위에 따라" 라고 말한다.

(in the Name, and by Authority of the good people of these Colonies.)

 

왜 그런가? 신중함의 이름으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일로 보인다. 그렇게 하면 신중한 명령의 가치보다 그 명령이 어디에서 나왔는지가 더 주목받기 때문이다. 독립을 결정한 이유를 제시하고, 그 이유의 타당성에 따라 판단받는 편이 낫다.

 

이러한 이유는 그들을 분리(separation)로 몰아간 "원인(causes)"이다. 여기에는 혁명의 일반적·보편적 원인, 즉 두 번째 문단에 제시된 원인과 미국의 구체적 상황에서 발생한 특수한 원인, 곧 "공정한 세계에 제출하는 사실"이 포함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악이 감내할 만한 동안에는 고통을 견딜 만큼 충분한 신중함을 보인다. 그러나 악이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스스로, 그것도 동시에 깨달을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소수의 현명한 지도자들이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따라서 신중함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신중함을 판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조리할 수 있다. 다만 그 신중함이 도덕성에 충분히 뿌리내리고 있어 지혜 그 자체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판단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독립선언에서 인격(character)이 차지하는 역할은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인격은 조지 3세를 반박하는 독립선언의 논증에서 핵심적이다. 그 논증은 놀랍게도 조지 3세를 세 차례나 폭군이라고 선언하는 데 이른다.

 

인격에 대한 고려는 미국 국민을 대신해 서명자들이 수행한 모든 활동에도 관여한다. 우선 신중함의 명령에 자유롭게 복종하는 것은 인격의 표지다. 독립선언에서 미국 국민이 대표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권리와 하나의 국민으로서 권리를 떠맡는 일이 명예롭게 연결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권리를 보장받고자 하는 열망은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는 생각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 체제는 권리를 다른 선을 추구하기 위한 조건으로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안전과 행복"이라는 선을 실현해야 했다.

 

따라서 조지 3세에 대한 고발은 그를 다음과 같이 비난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는 "자유로운 국민을 다스리기에 부적합한 군주"이며, 그의 "인격은 폭군을 규정할 수 있는 모든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폭군이 "자유로운 국민"을 다스리기에 부적합한 이유는 그 자유로운 국민이 동시에 "이 식민지들의 선량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의 서명자들은 바로 그 국민의 이름으로 행동했다.

 

신중함은 정치적 "원인"을 검토하고, 반복되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해 동기를 추론하며, 인간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통치자뿐 아니라 국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통치자가 어떤 국민을 다스리기에 "부적합"할 수 있다면, 국민 역시 어떤 통치자에게 부적합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선언은 조지 3세가 "문명국가의 수장에게는 전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행위를 명령했다고 고발한다. 그런 행위는 "가장 야만적인 시대에도 거의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국경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모든 연령과 성별과 신분을 파괴하는 것이 알려진 전쟁 방식"인 "무자비한 인디언 야만인들"을 동원하려 했다.

 

요컨대 선량한 통치자와 폭군의 구별을 보존하려면, "문명화된" 국민과 야만인을 구별해야 한다. 명예롭게 전쟁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도 구별해야 한다.

 

미국인들이 폭군 통치자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자유로운 국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이 자유로운 국민인 이유는 "선량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의 영국 형제들"은 "정의와 혈연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이러한 찬탈 행위를 부인하기를 거부한다. 미국인들은 "우리 영국 형제들의 타고난 정의와 아량"에 호소했지만 그 호소는 응답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조지 3세가 "공통의 혈연이라는 유대"가 인정하게 하는 것보다 영국을 통치하기에 더 적합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미국인들이 호소했다는 사실은 "선량한 국민"이란 정의와 혈연의 목소리에도, 신중함의 명령에도 귀를 닫지 않는 국민임을 보여준다.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정의와 아량"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덕목은 식민지 의회에 대한 국왕의 침해에 맞서 보여준 "남자다운 굳건함"에서 드러났다. 또한 "공공의 선을 위해 가장 건전하고 필요한" 법률을 지지한 데서도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입법부에서 대표를 가질 권리, 그들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하고 폭군에게만 위협적인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데서 드러났다.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권리란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고, 뛰어나게 귀중한 권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제퍼슨은 소책자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에 관한 개요」에서 이를 "영광스러운 대표권"이라고 불렀다.

 

미국 국민은 이 "영광스러운" 권리에 헌신함으로써 단순히 영국 국왕 아래에서는 자신들의 권리가 불안정하다고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격이 폭군의 지배를 받거나 폭군의 통치를 견디기에 "부적합"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식민지들의 선량한 국민"은 자연법 아래에서 자신들이 차지한 "지위"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바로잡는 의무뿐 아니라 자연법을 옹호함으로써 인류의 명예를 지키는 의무도 수행할 것이다.

 

제퍼슨의 독립선언 초안에 담긴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영국 국민과 갈라져 "행복과 영광으로 가는 길"에 오름으로써 "자유롭고 위대한 국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영광은 영국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 국민은 영국 국민과 다른 모든 국민의 진정한 권리를 위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연방주의자 논집』 제11편은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명예를 옹호하고, 오만한 형제에게 절제를 가르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It belongs to us to vindicate the honor of the human race, and to teach that assuming brother moderation.)

 

여기서 "오만한 형제"는 물론 영국을 가리킨다. 영국은 자연법 아래에서 자신이 누릴 자격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한다. 따라서 독립적이고 평등한 "지위"를 정당하게 차지하지 못한 국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영광은 다른 문명국들의 평등한 권리와 양립할 수 있다. 인류의 명예 역시 독립선언의 서명자들, 곧 미국 혁명의 지도자들이 지닌 명예와 양립할 수 있다.

 

독립선언 전체에는 고결한 정신이 흐른다. 그 정신은 인류의 의견에 보인 "상당한 존중"에서 시작되며, 미국 국민의 인격을 대변한다.

 

그 고결한 정신은 문서의 마지막 문단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제야 서명자들은 "총회에 모인 미합중국의 대표자들"로서 자신들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들은 먼저 이렇게 선언한다.

 

이 연합 식민지들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These United Colonies are, and of Right ought to be Free and Independent States,)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이 선언을 지지하기 위해 우리는 신의 섭리의 보호를 굳게 믿으며, 서로에게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신성한 명예를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And for the support of this Declaration, with a firm reliance on the Protection of Divine Providence, we mutually pledge to each other our Lives, our Fortunes and our sacred Honor.)

 


생명과 재산과 명예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명예는 고매한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이자, 고매함에 주어지는 불충분한 보상이다. 독립선언에서 명예는 마지막에 등장하지만 동시에 문서 전체를 이끄는 사상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자연법을 집행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신의 섭리"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보호"를 베푼다.

 

명예를 중시한다는 것은 비열한 성공보다 고귀한 실패를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의 섭리"에 대한 "굳건한 신뢰"조차 고귀한 성공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한 국민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차지하는 일은 어렵고 영웅적인 과업이다. 자연은 국민에게 독립할 자격을 부여하지만, 그 독립을 실제로 얻거나 잃는 일은 대체로 그 국민 자신의 역량과 공적에 달려 있다.

 

윈스턴 처칠(Churchill)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보장되는 것은 미국 국민이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합중국의 대표자들"은 "이 식민지들의 선량한 국민의 이름과 권위"를 부르기 전에 "우리 의도의 정직함"을 위해 "세계의 최고 재판관"에게 호소한다.

 

미국 국민의 인격은 누구나 알 수 있고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 있다. 대표자들의 "의도"는 그러한 인격에 명예를 더한다. 그러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는 "최고 재판관"뿐이다.

 

그럼에도 미국 국민은 독립선언에 담긴 대표자들의 말과 1776년 7월 4일까지 독립을 향해 나아간 그들의 행동을 살펴봄으로써 대표자들의 의도를 판단할 수 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격이다.

 

서명자들의 인격을 보여주는 표지는 그들이 지닌 "신성한 명예"다. 그 명예는 국민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 자신의 보존과 번영을 위험에 내걸도록 그들을 이끈다.

 

독립선언에서 명예는 명백히 정치적 관심사다. 명예는 서명자들이 서로에게 하는 서약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반면 "자연법"은 국민과 관련해 언급되고, 자연이 부여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는 개인에게 속한다.

 

명예는 그 중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명예는 개인의 권리와, 지구상의 열강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정부 형태 속에서 그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연결한다.

 

명예는 개인의 안전과 편의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권리를 끌어내어, 고유한 삶의 방식을 지닌 공화국의 목적이 될 수 있는 "안전과 행복"에 대한 더 넓은 이해로 이끄는 개념이다.

 

[찰스 R. 케슬러는 『Claremont Review of Books』 편집자, 클레어몬트 연구소(Claremont Institute) 선임연구원, 클레어몬트 매케나 칼리지(McKenna College) 정부학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두 헌법의 위기: 미국적 위대함의 부상과 쇠퇴, 그리고 회복』(인카운터 북스)이 있다.]

 

데일리인사이트 성예솔 기자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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